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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인물 :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
 EsangDance    | 2005·02·14 18:04
"20세기 발레혁명은 아직도 진행중"


   이번에는 그와 충분히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믿었다. '베자르 로잔 발레단'의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공연(11-12일) 때  함께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2001년 공연 때처럼, 그는 오지 않았다.

    2001년 1월 로잔 발레콩쿠르를 참관하기 위해 스위스 로잔에 갔다가 그곳  프레스비테르 가(街)에 있는 베자르 로잔 발레단 단장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너무 늙어 있었다. 1927년 1월 1일생이니까 74세를 넘긴 때였다. 그해 가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공연 때 한국에 오기로 돼 있었던 그는 "꼭 가겠다"고 했지만  어쩐지  올 것같지 않았다. 예전에 비해 기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매우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울 만큼 이글거리던 강렬한 눈빛, '정열'과 '카리스마'라고 쓰여  있던 그 형형한 눈빛….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어느 사이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적당히 퇴색해 있었고 눈꼬리는 내려가 있었다. 너그러워 보이는 게 나쁘진 않았지만 한편으론 서글펐다. 연전까지도 불같은 표정을 보곤 했던 내게는 잔잔한  충격처럼 밀려왔다.

    그 전에도 몇 차례 만나 대화하기는 했다. 1990년대 초반 브뤼셀 특파원으로 일하던 때 그의 공연 기자회견이나 모임에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기회가 종종 있었다. 93년 가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수진이 그의 안무 '요술피리'  주인공으로 춤추기 전후에도 무대 뒤에서 만나 잡담을 나누었다.

    사적인 얘기가 길어진 것은 20세기 발레를 혁명한 베자르가 대전 공연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 기자의 개인적 관심사를 넘어 한국 문화계로서도 몹시 서운한  일임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번 <문화초대석>은 '현재의 베자르'와 한 자리에 마주앉아 집중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그와 간헐적으로 나눴던 대화 내용과 이미 알려진 여러 사실, 그리고 무용이론가 장인주(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무용부문 상임연구원) 박사가 제공한 자료 등을 뭉뚱그려 쓴 것임을 밝혀둔다.

    
    ◇현대발레의 지평을 연 주인공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는 흔히 '20세기 발레의 혁명가'로  불린다.  그 이유를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무용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철학적  주제와 사회적 이슈들을 작품에 담았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겠다.

    그의 작품은 현대발레이면서도 고전적 정형미를 간직한다. 이는 고전발레의  전유물인 포인트 슈즈와 정통기교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현대무용에서는 고전(발레) 테크닉을 아예 배제하는 안무가들도 많은데요."
    "글쎄요. 하지만 기본이나 규칙 없이 새로운 동작이 나올 수 있을까요?"
    발레 외에도 현대무용, 재즈, 민속춤, 댄스스포츠 등 온갖 동작을 다 끌어다 섞어 쓰는 그로서는 의외의 답변이었다. 바로 그런 '혼합동작' 때문에 발레적  표현의 영역을 대폭 확장한 그로서는 말이다. 어쨌거나 발레의 중요성을  곧잘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한국의 창작가들에게 한번쯤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모던 발레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들 하는데, 글쎄, 토슈즈를 벗는다고  모던일까요? 모던은 형태나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정 동작이나 의상, 음악에  따라 고전발레와 모던발레를 구분할 수는 없다고 봐요.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어야겠죠."
    그렇다면 작품에서 테크닉은 어떤 것일까?
    "테크닉을 잊는 것이 가장 중요한 테크닉이죠. 그런데 테크닉을 잊으려면  테크닉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해요. 테크닉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경지라야 진짜 춤이 나오겠지요."
    베자르는 여성 위주의 발레를 남성 위주로 바꿔버렸다. 원래 춤의 중심은  남자이고 여자는 주변적 역할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정위치시켰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발상은 발레사에서 거의 한 세기만에 '남성 우위'를 불러왔다. 물론 '남성 부각'이라는 측면에서는 그의 선배들인  발레뤼스(20세기 초 새로운 발레로 서유럽을 강타했던 러시아 발레단)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무용단에는 탁월한 기량과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하면서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여성 무용수가 많다. 남자가 아니면 중요한  역할에  발탁되기 어려운 탓이다. 거기에는 베자르의 동성애도 분명히 한몫을 했을 테지만 그렇게  물어볼 순 없고….

    "당신 작품에서는 남성의 역할이 더 돋보입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음과 양의 결합에서 보듯이 인간은 상호보완적 존재입니다. 나는 안무에서 '힘의 평등과 균형'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원시무용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춤을 더 많이 추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그에게는 특정 인물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바슬라브 니진스키, 앙드레 말로, 이사도라 던컨, 미시마 유키오, 에바 페론 등등. 이 역시 발레에 극적 요소를 혼재시키기 위한 그의 '발레혁명'의 일부였다.

    "특정 인물은 발레 시어터(ballet theater)나 토털 시어터(total theater)를 구현하기에 적절한 소재가 됩니다. 발레가 줄거리 전달은 아니잖아요. 주인공의  비전이나 철학을 담기에는 순수동작 위주의 발레보다는 극적 요소가 가미된 발레 시어터가 편하지요."
    이런 극적 요소들과 함께 베자르를 대안무가로 만든 결정적 요인은 놀라운 음악적 감수성과 분석력이다. 가장 단순하고도 극명한 경우가 '볼레로' 아닐까. 거의 들리지도 않을 듯 미세하게 시작해 점차로 중폭하는 음악적 양감(量感)을 그처럼 아름답고 힘차게 신체로 표현해낸 안무가가 또 있을까.

    
    ◇파격과 천재성
    한번은 기자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피에르 불레즈(프랑스의 현대음악 작곡가)의 음악을 가지고 안무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나는 '라 트라비아타'와 불레즈의  차이점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음악적 난이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더구나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안무 당시에는 전곡을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창작곡의 경우, 언제쯤 필요합니까?"
    "음악은 공연 6개월 전에는 나와야 합니다. 작곡가(또는 음악 편집자)의 사정상 3개월 전에 받은 적도 있지만 모든 것을 분석하고 준비하려면 6개월은 필요해요."
    이 '음악천재'에게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니, 범상한 안무가들은 부디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일이다.

    지금까지 50년 간 그가 빚어낸 작품은 250편이 넘는다.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도 많고, 최근에야 발레단이 겨우 목록을 정리했을 정도로 그는 다작(多作)  유형에 속한다. '불새' '볼레로' '봄의 제전' '신의 어릿광대 니진스키' '현재를 위한 미사' '박티' '아다지에토' '1789 그리고 우리들' '우리의 파우스트' '오페라'  '놀라운 중국관리' 'Mr. M' '정화된 밤' 'Mr. C' '가부키' '생을 위한 발레' 등등.

    발표 때마다 대개는 경탄의 대상이 되고 이따금은 비난의 도마에 오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상업적 성공으로 연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용은 전형적인 비대중적 예술입니다. 그렇지만 당신 작품은 자주 흥행에  성공하는데요."
    "무용이 난해할지는 모르지만 비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춤은 있지 않습니까? 전통춤이든 대중춤이든 예술춤이든 사람들은 춤을 사랑합니다."
    베자르를 유명하게 만든 첫 작품은 1955년 발표한 '한 남자를 위한 교향악'이었다. 이어 '봄의 제전'과 '볼레로' 같은 출세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1959년 '봄의 제전'이 성공하면서 그는 20세기 발레단을 결성했고, 이후 벨기에 왕립  모네  가극장 전속발레단이 되면서 사반세기에 걸친 화려한 브뤼셀 시대(1960-87)를 구가하게  된다.

    이 두 작품은 강렬한 리듬에서 움직임이 생성된다. 이런 특징은  '현재를  위한 미사'(1967)에서 더욱 강조되는데 로큰롤 분위기의 음악에 가죽바지를 입은  무용수가 등장하는 파격은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되도록 여러 주제와 많은 소재, 갖가지 장치를 한 작품에 담는다는 점에서 복잡하거나 잡다하게 보일 수도 있다. 평론가들에게서 '수다스럽다'는 핀잔도 자주 받는다. 그러나 그로서는 치밀한 계획 아래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배치하고 삽입하는 것들이다.

    
    ◇끝없는 관심
    "어릴 적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오페라 감상만으로는 뭔가 아쉬워서 아예 노래공부도 하고,  마르세유 극장의 일요일 낮 오페라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관람했어요. 그러다가 할머니가 하던 골동품 가게의 헌 잡지들을 읽으면서 이번엔 연극에 흥미가 생겼죠."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무용을 알게 되면서 그때까지의 모든 것이 무용을  위한 준비였음을 그는 알았다. 18세에 마르세유 발레단에 입단했고 이듬해 파리에서 수학한 데 이어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스웨덴 쿨베리 발레단에서 무용수 생활을 하면서 '불새'를 안무하기도 했다(이 작품은 1970년 새 버전으로 거듭나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처럼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과 오페라에 대한 열정은 그에게  아예  오페라 연출에 나서게 했다. 1961년 '호프만의 이야기'로 첫 연출에 도전, 현대감각적인 처리로 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 루제로 라이몬디, 카티아 리치아렐리가  출연하는  '돈 조반니' '살로메'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많은 오페라를 무용화하거나 오페라와 관련된 춤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나중에는 아예 '오페라'라는 발레를 내놓았다. 오페라의  정의(定義)와 이념, 베르디와 파졸리니의 세계를 뒤섞어 놓은 것이었는데 연기와 대사, 춤, 음악이 그럴듯하게 반복되는 바람에 지루함은 면했지만 소란스럽고  무의미한  잡담과 객설(客說)로 격하될 위험도 없지 않았다.

    1993년 가을 강수진 주연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공연한 '요술피리'는 모차르트의 동명 오페라 음반을 그대로 틀어놓고 발레로 만든 작품인데, 원작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웬만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깍듯하게 만들어졌다.  그런가 하면 주제음악만 살려 산뜻하게 오페라 전체의 이미지를 전달한 작품도 안무하는 등 오페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실로 대단하다.

    "오페라 연출과 안무의 차이는 여러 나라 말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은 모국어로 하고 표현은 다른 언어로 할 수 있듯이, 오페라  연출이나  안무나 같은 맥락이지요. 둘 다 음악이 지시하는대로 반응하면 되거든요."
    그는 연극 연출도 몇 편 했고, 영화 연출에도 손을 댔다.

    장-루이 바로가 1946년 영화 '천국의 아이들'을 제작할 당시 광대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했던 응시자 가운데는 마임의 거장 마르셀 마르소와 함께 베자르도 끼여 있었다. 결국 마르소가 뽑혔지만 바로는 자아에 대한 확신이 유달리 강했던 베자르 모습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고 술회한 바 있다.

    
    ◇"나는 아버지와 쌍둥이로 태어났다"
    직업적 문필가를 제외한다면, 베자르만큼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유명한 작가이자 철학가였던 아버지(가스통 베르제,  Gaston  Berger)한테 유별난 정을 가지고 있었다. 베자르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32세에 교통사고로 아버지마저 잃었는데, 사후에도 그에 대한 아버지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파우스트'를 읽어주었고, 아들은 그 내용을  기억해두었다가 여동생과 함께 인형극 놀이로 만들었다.

    베자르는 뛰어난 글재주로 '무용의 다른 노래' '타인의 생 속의 한 순간' '누구의 인생인가' 등 안무 노트와 무용철학을 담은 책을 여러 권 냈다.

    그런데도 그는 아버지의 성인 '베르제'를 버리고 '베자르'라고 고쳤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가족의 영향을 떠나 내 자신이 되고 싶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후일 어느 인터뷰에서는 "종교와 전쟁까지도 상업적으로 뒤바뀌는 세상이 나는 싫다. 모든 사고가 계산적으로 바뀌어간다. 그렇다. 나도 별 수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라고 언급해 상업적 의도가 없지 않았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가족에게서만 독립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품도 등졌다. 롤랑  쁘띠같은 동년배 무용가에 비해 자신을 별로 대접해주지 않았던 파리에  대한  섭섭함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는데, 후일 파리 오페라 발레가 그를 총감독으로 모시겠다고  했을 때에도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는 벨기에 왕립 모네 가극장 총감독인 제라르 모르띠에와의 불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브뤼셀을 떠나 1987년 로잔으로 둥지를 옮겼을 때에도 여전히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마르세유 사람"이라고 되뇌고 있었다.

    한편 아시아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경도 역시 철학자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고향처럼 느낀다'고 말할 정도다.

    "지나치게 일본에 기울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에 대해서도 웬만큼 일고 있고 당신네 한국이 훌륭한 문화와 철학의 전통을 지닌 나라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베자르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공연했다. 전통예술인 '노'와 '가부키'를  각색해 발레로 만들었으며 도쿄발레단을 이끌고 파리 공연을 하기도 했다.

    '가부키'에서는 기모노의 화려한 문양과 채색을 과시하는가 하면 흰 도복의  사무라이들이 붉게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집단으로 할복자살을 한다. 그런가 하면  극우파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일생을 다룬 'Mr. M'은 너무 일본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해서 유럽 공연 때에는 일부 관객들이 역겹다는 표정으로 중간에 나가버리기도 했다. 한 일본인 친구에게 "베자르처럼 적극적이다 못해 극단적인 일본문화 전파자를 두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했더니 그는 "일본 정부가 베자르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라고 맞받았다.

    
    ◇조르주 동의 만남과 이별
    누구나 그렇듯 베자르 역시 특정 무용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를  위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작곡가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주자의 특징을 살려  곡을  헌정하듯 안무가들은 무용수의 인상이나 신체적 특징, 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작품을 빚어낸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면 단연 조르주 동(Jorge Donn. 호르헤 돈, 1947-92)을 꼽아야 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이 무용수는 1963년 베자르의 무용단에  합류한 이후 베자르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던 전설적인 무용수였다.

    조르주 동이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지만 오랜 인생의 동반자를 잃은 베자르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 이듬해 한 인터뷰에서 정말 이걸 물어도 될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르주 동이 세상을 떠난 이후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요?"
    옆에 있던 극장 홍보담당자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있었지만 정작 베자르 자신은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앞에는 삶, 죽음, 그리고 사랑 밖에 없습니다."
    그를 잃은 슬픔을 딛고 만든 작품이 1997년 발표된 '사제관은 그  매력을  전혀 잃지 않았다. 정원도 그 눈부신 모습을 잃지 않았고(영어 제목은 '생을 위한 발레'(Ballet for Life)'이다. 불운하게 살다 간 '무용의 신' 니진스키, 팝가수 프레디 머큐리, 그리고 조르주 동. 비슷한 나이에 세상을 등진 이 천재적 예술가들을  추모한 작품으로, 2001년 서울에서도 공연됐다. 그의 말처럼 '사랑과 생명' 예찬이었다.

    베자르에게는 친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비명에 간 의상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1946-97)를 특히 못 잊어한다.

    "그는 너그러움이라는 미덕을 지닌 인물이었죠. 어떤 한 장면을 위해  의상  한 벌을 부탁하면 무려 스무 벌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의논했어요. 그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장인정신이 예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냉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베자르의  사랑은 의외로 속깊다. 브뤼셀에서는 무드라, 로잔에서는 루드라 학교를 세워 숱한 무용 인재를 배출한 것도 남다른 점이다. 지금 그곳 출신들이 유럽 무용계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베자르 이후로도 세계 무용계에는 탁월한 안무가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이리 킬리안(네덜란드 단스테아터 예술고문) 같은 이는 어떤 측면에선 이미 베자르를  넘어섰으며 스페인 국립무용단의 나초 두아토, 함부르크 발레의 존 뉴마이어,  스웨덴의 마츠 에크, 이스라엘 바체바무용단의 오하드 나하린 등, 그리고 근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체극 성향의 젊은 안무가들까지 포함해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안무가가 저마다 능력과 개성을 과시하며 춤 창조의 영역 확장에 도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글거리던 눈빛이 많이 처졌음에도, 적어도 한 가지는 후배들이  베자르를 따라갈 수 없을 것같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베자르는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정열과 환상을 이끌고  받쳐주는 그의 비범한 '지성'이다.

    예민, 재능, 정열, 실험정신--이 사소한 항목들에 매달리지 않고 그것들을 감싸안으며 넘어서는, 이 시대에 또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대형 무용가' 베자르는  아직도 그의 20세기 발레혁명을 끝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yesno@yna.co.kr
(끝)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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